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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n on



회사에서 밤샘하는 남자친구에게 새벽 전화를 청해, 기어코 힘든 감정들을 쏟아냈다. 이 사람은 내가 숨도 안쉬고 늘어놓는 단어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거칠고 어지러운 문장들과 얽힌 스토리를 어렵게 알아들으며 중간중간 셀프 요약 정리하고 그랬다. 내게 없는 것. 심플하고, 냉정하며, 강인한 것. 내 깊이 안에 썩은 똥물이 고여있다면 날 경청하는 사람의 깊이 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말랑하며 유연한 물질이 가득한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흔들리지 않고 상처받지 않겠냐만, 다잡아가고 견디는 힘이 있는 클래스란, 분명히 나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꼴딱 새다시피하고 퇴근 시간 맞춰 남자친구 회사 앞에 갔다. 어디 푹신한 소파 있는 데서 한덩어리처럼 되어 몇시간 졸아야지, 했던 내 계획은 무너졌다.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여기저기 명랑하게 돌아다니고 싶었던 남자친구와 땅바닥 뚫을 기세의 무기력, 우울에 숨막히고 있던 나는 뭔가 발란스가 맞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열 걸음마다 안색을 살피며 물어봤다. 왜 그렇게 피곤해. 힘이 없어. 졸리지. 괜찮아? 하고.


그렇게 걷다가,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있는 곳에, 짠, 하고 도착했다. 웃기게도, 나는 스케이트장이란 곳을 실제로 보는 게 처음이었다. 이렇게 안추운데 얼음이 왜 저렇게 잘 있어? 하고 물어보았다.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는 잊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님 좌석, 처럼 생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오래동안 말없이 있었다.


남자친구의 오른쪽 어깨에 볼을 비비고, 무거운 머리통을 통째로 얹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는듯 모든 생각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은 옆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내내 손을 만지작하고, 통째로 내준 팔을 끌어안고, 굳은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며 마음도 녹았다. 내가 이 사람 옆에 있고, 숨과 체온이 전해지고, 가까이 바라볼 수 있고, 심지어 눈이 마주치면 사랑스럽게 웃어주는데, 뭐가 어렵고 심각할까.


생애 첫 스케이트장 풍경은, 정말 피곤했던 날 기댈 수 있었던 어깨, 쉼과 위안으로 기록.